10여년전,  
나는 어느날 문득 미술이 하고 싶어졌고 가벼운 마음으로 무작정 한 미술학원의 문을 두드렸다.
그날은 토요일 늦은 저녁이었는데 다행이도 그날 대청소날이라 불이 켜져있던 한 미술학원이 있었다.

그때 난 뽀글뽀글 파마머리로 한껏 멋을 낸 대학 2학년 생이었다.
그리고 빨려들듯이 나는 그날부터 미술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마디로 무작정 시작된 미술이 내 인생의 엄청난 터닝포인트가 될 줄 그땐 추호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막무가내인 나를 맑은 눈으로 바라보아주신 한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  막 서른이 되신  미술학원의 젊은 원장님은 정말 등푸른 고등어처럼 팔딱거리는 열정이 있으신 분이었다.
그리고 학원비도 내지 못해 쩔쩔매는 나에게 한결같은 응원을 해주시는 나의 든든한 빽^^이었다.

미술은 정말 재미있었다. 시간가는 줄 몰랐고 마냥 신이났다.
그랬기에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본격적인 미대입학 준비생활을 시작한것은 내겐 너무나 당연하고, 쉬운 선택이었다.

재수시절, 선생님은 때론 상담도 해주시고 때론 혼도 내시고 때론 집에 가는길에 짜장면도 사주시면서 나를 많이 챙겨주셨다. 솔직히 마음속으론 멋져보이는 메이저 미술학원으로 옮기고픈 마음도 살짝 있었지만 그 선생님만 보면 현재의 내 생활이 다시 좋아지고 힘이났다. 여기서 엄청 열심히 해서 선생님이 자랑스러워하는 그런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해 겨울, 내가 정말 원하던 첫 대학을 낙방했다.
당연히 갈수 있을거라 확실히 믿었었는데 낙방한것이 그땐 믿을수 없이 속상했다.
내가 원서를 낸 곳은 단 두곳.
이제 다른 한곳의 발표만을 기다리며 난 초조해졌다.
나머지 한곳까지 떨어져 내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까 조바심이 났다.

학원에 갔더니 그 소식이 있었던 날
원장선생님이 머리를 빡빡 미셨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첫번째로는 정말이지 너무 죄송스러웠고
두번째로는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자의 안타까움은 선생님에게도 똑같은 마음의 안타까움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한곳의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뛸듯이 기뻤고 정말이지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것이 내겐 너무나 큰 흥분이었다.
정말 이번에는 열심히 해보고 싶고, 내가 정말 푹빠져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그 뒤로 몇번 선생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곤 했지만
나의 새로운 인생 속에서 선생님은 점점 희미한 기억이 되어갔다.

그동안 미술학원이 우여곡절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
젊음을 바쳐 만든 학원이 야비한 세상논리에 휩쓸려 없어진 이야기
그 이후로 많이 힘들어하신다는 이야기
.....
이런 것 조차도 모두 잊혀져갔다.

그리고 지금,
뒤돌아보니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넘게 흘렀다.
정말 가끔씩 생각이 나기도 했지만 나의 바쁜 일상을 핑계로 지나쳐 가고 있었는데
그저께 우연히 미술학원을 같이 다니고 나와 특별한 인연으로 함께하는 재철이에게서
선생님 소식을 들었다.

선생님께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에게 무료로 미술을 배우게 도와주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전해들었다는 것이었다.

대뜸, 갑자기, 퍼뜩!
선생님이 보고싶었다.  
 
그리고 오늘 난 12년전 나의 두번째 인생을 시작하게 해주셨던 그분을 만났다.

첫느낌은 정말 그때랑 똑같았다. 하나도 안변하신거 같았다.
순수하고 따뜻한 그 눈빛...
날 보고는 너무나 환히 반겨주시는 그 손짓...

나는 어느새 12년전 아무것도 모르던 뽀글머리의 여대생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사셨어요? 못찾아뵈서 너무 죄송해요. '
마음속으로 되뇌어지는 말...

그리고는 선생님과 선생님의 빛나는 와이프분과 재철이와 나는 정말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들을 듣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몰랐다.
나는 선생님에게 그동안 많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수하고 꿈이 많았던 선생님에게 그 동안의 세월 속에 참 힘든 날이 있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진 풍파는 그 부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주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모든 경험들이 두분의 현재를 더욱 눈부시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다.
단지 변한게 있다면 눈빛이 더욱 깊어지신것이었다.

오늘 함께하는 순간이 우리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난 그분을 존경한다.

'선생님, 선생님은 저에게 있어 정말 너무나도 감사한 분입니다. 저의 새로운 인생 출발점에 가장 큰 힘이 되어주신 분이거든요. 선생님의 따뜻한 지도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


살다보면 참 소중한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쉽게 그 인연들은 잊혀지기도 하고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오늘 만난 네 사람
선생님, 선생님의 아내, 재철이, 나

우리의 소중한 인연을 다시 발견한 느낌


오늘 나는
어제보다 더 마음의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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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셈씨 2008/06/14 22:24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그 분께 감사해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훌륭한 선생님 만나셔서 ^^
    실장님이 무사히 미대에 입학하시고
    그곳에서 그림과 디자인을 가까이 두고 어떤 영감을 얻고
    설은아 닷컴을 만들고
    포스트비쥬얼을 만들고
    멋진 작품들을 많이 만들고
    굉장한 상들을 받고
    유명 크리에이터가 되셔서 멋진 다큐에 출연하고
    저는 그걸 보고 아, 멋진 사람이다라고 느끼고
    이런 멋진 사람!! 꼭 만나보고 싶다!! 고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실장님을 만나게 된거니까요 -

    ^^ 으흐흐~

  2. 설은아 2008/06/19 13:27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세문선임을 만나기 위한 수많은 인연과 흐름들...
    그 모든것에 나도 무조건 감사^^

  3. 심윤식 2008/06/17 04:11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시간의 공백은 찾기 어려웠다.
    여려 보이는 그 모습도 여전했고..
    눈과 입을 주시하며 이야기를 듣던 진지한 모습도 하나 변하지 않았어......


    일구어 놓은 성과들은 신문, 인터넷등의 매체에서 언제나 쉽게 접하고 있었기에
    월,화,수,목,금,금,금 이라는 너의 표현을 쉽게 느낄수 있었고......
    천사처럼 웃는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는 나와 아내까지 행복해졌어.
    지금의 우리 학생들에겐 얼마나 우쭐거리며 자랑을 했는지 몰라.

    블로그에 이 글을 읽으면서는.... 선물을 받은듯 너무도 고마웠어.



    각자 자신의 일을 열심히 했을뿐일텐데
    생각 할수록 참~~~~~~~~~~~~~ 기쁘고 행복하네......*^______.______^*



    모든 영광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